중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순례를 떠났고, 그 길을 따라 도시가 생기면서 순례자를 위한 성당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성당에 기독교 교리를 알려주는 조각이 새겨지면서, 그동안 우상 숭배 금지로 인해 건축물의 장식으로만 활용되던 조각이 점차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순례길 약 800년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뒤로 유럽 각 지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스페인 땅의 끝에 위치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가는 길이 만들어지고 그 길과 함께 도시가 생겼습니다. 오늘날에도 산티아고 순례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프랑스에서 시..
중세 시대에는 살아 있는 동안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해 성지 순례 열풍이 생겼고, 그로 인해 지역 간에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그들은 성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성물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성지 순례길을 따라 도시가 성장하면서 중세 사회의 모습은 많이 변했습니다. 중세 시대의 성지 순례 열풍 많은 중세 사람들은 성경의 '최후의 심판'이 서기 1,000년에 발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1,000년에 세상이 멸망한다는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중세 유럽인에게 큰 영향을 미친 기독교가 최후의 심판이 올 것이라고 알렸고,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별 일 없이 1,000년으로 넘어가자 사람들은 허무하다고 느끼면서도 안심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고, 사회..
중세는 샤를마뉴의 등장으로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던 유럽이 안정을 찾아가면서 생기가 넘치고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지는 시기였습니다. 샤를마뉴는 넓은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봉건제와 기독교를 이용하였고, 이는 유럽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중세 시대 유럽의 발전 천 년 전 유럽에는 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도시가 없었습니다. 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의 인구가 약 50만 명이었고, 이슬람 세력의 중심이었던 스페인의 코르도바의 인구도 거의 50만 명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그에 비하면 그 당시 유럽은 비잔티움 제국과 이슬람 제국에 둘러 싸여 겨우 그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도시의 규모로 발달의 정도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도시의 규모를 통해 사회 체제나 통치력의 정도를 ..
고대 로마 제국이 몰락하고 난 뒤에 혼란스러웠던 서유럽은 샤를마뉴가 나타나서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점차 안정을 되찾았고, 독실한 기독교인인 샤를마뉴 왕으로 인해 기독교를 중심으로 교황과 연맹하여 강력한 왕국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 거의 400년 동안 교회 건축물이 지어지지 못했는데, 팔라틴 예배당을 시작으로 건축의 모색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샤를마뉴 왕과 카롤링거 르네상스 8세기 후반부터 9세기까지를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중세의 형태가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보기 힘들었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유산들의 복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무질서가 정리되는 시기, 중세의 암흑기가 종료되는 시기입니다. 카롤링거 왕조의 대표적인 왕이 샤를마뉴인데,..
영국은 로마 제국의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게르만족의 대이동에 영향을 많이 받아서 앵글족과 색슨족이 많이 유입되었습니다. 그들은 영국에서 아름다운 공예품을 제작하였고, 기독교를 수용하여 아름다운 필사 성경을 만들었습니다. 앵글로색슨족의 미술 영국은 일찍부터 로마 제국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로마 제국의 변방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게르만족의 대이동에서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408년에 로마군이 로마 시를 구하기 위해 철수를 하자 게르만의 앵글족과 색슨족은 바로 영국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후 주트족까지 합세하여 5세기부터 영국 땅에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이들을 앵글로색슨족이라고 일컫습니다. 이 시기의 문화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는데, 1939년 이 발견되면서 그나마 조금 드러났습니다. 은 일종의 무덤으로 ..
로마 제국이 쇠퇴할 무렵,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새로운 시대가 펼쳐졌습니다. 야만족이라 불리던 게르만족이 서로마를 차지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유럽의 학문과 예술에는 암흑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만 속세와 동떨어진 곳에 위치한 수도원에서 고대 문명의 명맥이 이어집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로마인들이 야만족이라고 무시했던 게르만족은 5세기경 서유럽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게르만족은 유럽 북쪽에서 게르만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을 통칭해서 가리키는 말입니다. 현재 북유럽과 독일, 영국에 게르만족의 후예들이 다수 있습니다. 게르만족은 전투에 강한 민족이라서 로마의 번영기인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있었던 로마군과의 전투에서도 승리하였습니다. 그런데 게르만족은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 전해지는 게르만족에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