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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이 4.2m, 너비 1.2m의 청동문이 2개 있으며, 왼쪽에 구약성서 8개,, 오른쪽에 신약성서 8개가 조각 되어 있습니다.
    베른바르트 청동문

     

     

    중세 유럽을 다스리던 세력은 황제와 교황으로 나뉘어 있었고, 황제와 교황은 서로 더 큰 권력을 가지기 위해 권력 다툼을 하였습니다. 그 과정은 중세 건축과 중세 미술 속에서 표현되는데, 여기서는 오토 3세의 필사화와 성 미카엘 수도원의 베른바르트 청동문, 그리고 베른바르트의 기념주와 슈파이어 대성당을 살펴봅니다.

     

    오토 3세의 필사화

    오토 3세는 신성로마제국에서 세 번째로 황제에 올랐는데, 그때 나이 세 살로 어머니와 할머니의 섭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14세가 되었을 때 실제 황제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첫행보로 자신의 사촌을 교황에 임명하였는데, 그가 바로 그레고리우스 5세입니다. 오토 3세를 위해 만들어진 성경 필사본에 있는 그림을 보면, 예수가 있어야 할 자리에 황제가 있고, 4대 복음서의 저자들이 황제의 주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에서 대지의 신이 황제를 받치고 있고, 위에서 하느님의 손이 내려와 왕관을 씌워주고 있습니다. 황제의 권력을 과장해서 보여주는 그림인데, 실제로는 오토 3세의 권력은 약했습니다. 이전의 샤를마뉴 왕은 교황과 협력하여 자신은 교황의 뒤에서 권력을 누리면서 교황을 전면에 나서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토 황제 이후에는 교황과의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황제가 교황을 임명하며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였습니다.

     

    성 미카엘 수도원의 베른바르트 청동문

    힐데스하임의 성 미카엘 수도원에 있는 청동문을 베른바르트 청동문이라고 불리는데, 이 청동문을 보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이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높이 4.7m, 폭 1.2m의 무게 1.8톤의 두 개의 청동문에는 모두 열여섯 개의 장면이 있습니다. 왼쪽 문에는 창세기에 대해서 묘사되어 있고, 오른쪽 문에는 예수의 일생에 대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청동문의 왼쪽과 오른쪽 조각이 짝을 이루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왼쪽에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이브가 있으면 오른쪽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저지른 원죄로 인해 예수가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더 살펴보면,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느님에게 꾸지람을 받는 장면에서, 아담과 이브는 뱀을 가리키며 서로에게 잘못을 떠넘기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을 표현한 조각은 비율도 맞지 않고 공들여서 작업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세에는 그리스 로마 시대와 전혀 다르게 인간의 몸을 죄의 근본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이브는 구부정한 자세를 하고, 그들의 몸은 명확하게 표현되지 않습니다. 중세의 미술가들은 조각을 제작할 때 신체의 사실적인 표현보다는 신의 뜻을 전달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인체를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다양한 인물들이 나와서 풍성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내용은 단순하지만 표현은 구체적이고 직설적입니다. 중세 조각을 비롯한 중세 미술은 성경에 있는 예수의 이야기나 기독교의 원리 등을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베른바르트의 청동 기념주와 슈파이어 대성당

    신성로마제국의 베른바르트의 청동 기념주는 베른바르트 주교의 지시로 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트라야누스 황제 기념주와 형태가 비슷해 보이는데, 내용은 예수의 수난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로마제국의 부활이라는 슬로건 아래 탄생했기 때문에 로마네스크 미술의 형식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고대 로마를 이어가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신성로마제국의 로마네스크 양식은 단지 고대 로마의 건축 양식을 추구함은 물론이고 로마 제국의 영광을 기원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슈파이어 대성당은 잘리에르 왕조 시대에 지어진 고대 로마 건축의 양식을 재현한 건축물입니다. 독일의 라인란트팔츠에 있고, 잘리에르 왕조의 여러 황제들이 묻혀 있습니다. 슈파이어 대성당은 1기가 지어진 후 하인리히 4세에 의해 증축되었습니다. 슈파이어 대성당은 하인리히 4세의 카노사의 굴욕과 관련이 있습니다. 카노사의 굴욕은 주교 임명권을 두고 교황과 황제의 다툼 중에 벌어진 일입니다. 1076년에 교황 그레고리 7세가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폐위시킵니다. 그러자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카노사에 가서 맨발로 눈을 밟고 3일 동안 교황에게 용서를 구하고 사면을 받았습니다. 교황권이 아주 강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그 후 4년 뒤에 세력을 공고히 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을 파면하고 로마로 가서 클레멘트 3세를 새 교황으로 추대하였습니다. 이렇듯 황제와 교황이 경쟁 관계에 있을 때, 하인리히 4세는 당시 가톨릭의 클뤼니 수도원의 규모를 뛰어넘기 위해 천장을 5m 높이는 증축 공사를 진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