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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킹의 랑스킵
    바이킹의 랑스킵

     

     

    유럽의 제일 북쪽에 살던 바이킹은 추운 날씨로 인해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바다를 이용하기 위해 해로를 개척해 해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린디스판 수도원에 침략한 이후 랑스킵을 타고 다니며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10세기 이후 바이킹은 프랑스의 센 강 하류에 자리 잡으며 프랑스인들 사이에 서서히 스며들었고, 그들 중 일부는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를 정복하여 노르만 양식의 배경이 되는 노르만 왕국을 탄생시켰습니다. 

     

     

    바이킹의 등장과 그들의 영향력 

    바이킹은 유럽의 제일 북쪽에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덴마크에 살았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북쪽 사람을 뜻하는 노르만이라 불립니다. 바이킹은 춥고 척박한 땅에서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바다로 향해야 했던 민족입니다. 북유럽은 피오르라고 불리는 빙하가 만든 좁고 깊은 계곡이 있는 독특한 지역입니다. 바이킹은 농사를 짓기에는 너무 추운 곳에서 살고 있었지만 환경에 적응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바다를 이용하다 보니 해로를 개척하게 되었고, 또한 배를 만들고 항해하는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바이킹은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먹을 것을 구하다가 점점 해적으로 변해갔습니다. 793년, 바이킹은 영국의 홀리 섬에 위치한 린디스판 수도원에 쳐들어와서 수도사들을 잔인하게 학살하면서 그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바이킹의 잔인함에 충격을 받았는데, 바이킹은 이때부터 수백 년 동안 전 유럽을 침범하면서 악명을 떨쳤습니다. 바이킹이 등장했던 시기에 유럽 국가들은 배를 타고 멀리 나갈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이킹은 린디스판 수도원이 있던 외딴섬을 자유롭게 침범할 수 있었습니다. 바이킹이 가장 활개를 치고 다닐 때에는 대서양뿐만 아니라 지중해까지 누볐습니다. 그들이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바이킹이 아이슬란드를 지나 그린란드까지 갔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기 때문에 더 서쪽으로 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이킹은 동쪽으로 진출하여 러시아의 기원인 키예프 대공국을 세웠습니다. 러시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지만, 유력하게 받아들여지는 학설입니다. 또한 바이킹은 남쪽으로 영국, 아일랜드, 프랑스, 스페인을 지나 지중해와 흑해까지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바이킹의 랑스킵

    바이킹은 린디스판 수도원을 침략한 783년 이후 거의 300년 동안 유럽의 강과 바다를 다스렸습니다. 바이킹이 타고 다니던 긴 배란 뜻의 랑스킵이 출몰하면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랑스킵은 보기에는 약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강력한 함선이었습니다. 20세기 초에 발견된 랑스킵을 보면 길이 21m, 폭 5m 정도이고 배 가운데에 10m가량 되는 돛대가 세워져 있습니다. 양쪽에 각 15개의 노가 있어서 30명의 사람들이 노를 저었습니다. 랑스킵의 여러 곳을 살펴보면 과학적인 설계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랑스킵의 앞과 뒤의 모양이 똑같아서 노의 방향을 바꾸면 전진과 후진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바이킹은 랑스킵의 바닥을 평평하게 만들어서 얕은 물에서도 항해할 수 있었고, 돛을 눕힐 수 있게 만들어서 장애물이 있어도 부딪히지 않았습니다. 바이킹은 뱃머리를 용머리처럼 보이게 만들어 장식했습니다. 뱃머리의 조각을 살펴보면 북방에 사는 사람들답게 동식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문양으로 장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이킹이 린디스판 수도원을 침략했을 때의 모습을 기록한 것을 보면, 바이킹과 용이 나타났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기서의 용이란 랑스킵의 뱃머리 장식을 보고 표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에는 랑스킵이 최고의 함선이었다 하더라도 이 정도 규모의 배로 먼바다에 나가는 것은 힘들었을 것입니다. 바이킹은 항해가 가능한 시기를 가늠하여 해안을 따라 해로를 개척하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비로소 8세기 말 경에 준비를 완료했습니다.

     

     

    노르만 양식의 배경이 되는 노르만 왕국의 탄생

    중세 유럽은 8세기부터 혼란에 빠졌습니다. 바이킹과 더불어 이슬람 세력과 마자르족의 침입이 계속되면서 중세 유럽은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바이킹은 북쪽에서, 이슬람 세력은 남쪽에서, 마자르족은 동쪽에서 침입했습니다. 유럽에서는 샤를마뉴에서 오토 1세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왕권을 가진 황제들이 그들의 공격에 맞서 싸웠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침입자들에 의해 많은 건축물들이 사라졌습니다. 유럽은 침입자들에 대항하면서 봉건제가 강화되었고 이러한 침입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기사와 같은 전문 전사 계급이 확충되었고, 자유민들도 기사나 영주에게 토지를 바치며 보호를 요청했기 때문에 봉건제가 확고해졌습니다. 10세기가 되자 바이킹은 기존의 침탈 방식을 변경하여 한 곳에서 몇 년 동안 머무는 방식을 취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샤를 3세는 오히려 바이킹에게 땅을 주고 충성 맹세를 하도록 하여 주종 관계를 맺기도 했습니다. 샤를 3세와 계약을 한 바이킹의 대장 롤로는 땅을 받은 대신 프랑스를 침범하는 다른 바이킹족을 막아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롤로는 로베르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의 제후가 되었습니다. 롤로가 있던 지역이 센강 하류였는데, 이때부터 바이킹들이 있는 센강 하류의 땅을 노르망디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프랑스의 왕족의 딸이나 귀족의 딸과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조금씩 프랑스인들 사이에 스며들었습니다. 바이킹은 정착한 뒤에도 남쪽으로 영토를 넓혀서 넓은 땅을 차지했습니다. 노르망디에 살던 일부의 바이킹은 11세기에 이탈리아의 남부로 가서 그 지역의 비잔티움 제국을 몰아내고 이슬람 세력의 시칠리아까지 정복하면서 노르만 왕국을 세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