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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에는 대성당과 수도원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대성당과 수도원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했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은 기존의 교회 조직을 이용하여 행정 조직을 개혁하고 통치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황제와 교황은 격렬한 주도권 경쟁을 하게 되며 이로 인해 수도원의 건축 양식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중세 시대의 중심지, 대성당과 수도원
대성당은 기독교의 고위 성직자인 주교가 있는 지역에 위치한 성당을 말합니다. 그래서 대성당은 한 지역에 하나만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있는 곳의 대성당을 더 거대하고 성대하게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프랑스의 카테드랄, 영국의 캐시드럴, 이탈리아의 두오모, 독일의 돔은 모두 대성당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고 대성당의 공식적인 명칭은 복잡하기 때문에 보통 '어느 지역의 대성당'으로 많이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 피렌체의 대성당은 원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이지만 일반적으로 '피렌체 대성당'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대성당은 중세 시대부터 지역을 대표해 왔기 때문에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건축물입니다. 대성당은 거대한 규모로 인해 멀리서도 눈에 띄었고 이정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순례자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대성당으로 모이면서 식당이나 숙소 등이 생겨 대성당 주변은 점점 번화가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도시가 발달하였고 현재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중세에는 성당과 대성당을 포함해 수도원도 많이 세워졌습니다. 수도원은 처음 교회가 생기면서부터 중세까지 기독교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부 수도원은 대성당과 비슷한 지위에 있었고, 수도원의 규모도 대성당에 못지않았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생 피에르 수도원이 있는 무아삭과 같이 수도원이 중심이 되어 발달한 도시들이 있었습니다. 중세의 기독교는 대성당을 주축으로 하는 행정 시스템을 구성하고 그 외 수도원의 조직도 추가적으로 구축하였습니다.
힐데스하임 대성당과 성 미카엘 수도원
독일의 힐데스하임은 그 지역을 관장하던 주교 베른바르트가 추진해 만든 계획도시입니다. 베른바르트는 샤를마뉴 이후에 유럽의 황제가 되는 오토 가문과 인연이 있었습니다. 베른바르트 주교는 도시를 정비하면서 대성당과 대규모의 수도원도 짓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이 힐데스하임 대성당과 성 미카엘 수도원입니다. 힐데스하임 대성당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거의 파괴되어 지금까지 복원하는 중입니다. 대성당과 수도원의 크기는 거의 비슷한데 다른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습니다. 대성당은 전형적인 교회 건축 양식이고, 수도원은 건축 양식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힐데스하임 대성당의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와 비슷합니다. 신도석 양쪽으로 복도가 있고, 신도석과 복도 사이에 아치와 기둥이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 미카엘 수도원은 변화된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 수도원은 신도석이 가운데 있고 양쪽에 복도가 있는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의 모습을 따르지만 큰 변화된 부분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교회의 구조는 동쪽에 제단이 있고, 서쪽은 신도들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서쪽에 정문이 있고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갑니다. 교회의 동쪽은 모든 의식이 진행되는 곳이며 사제와 성가대가 자리합니다. 그런데 성 미카엘 수도원은 정문은 서쪽이 아니라 남쪽과 북쪽에 있고, 서쪽의 예배 공간이 커졌습니다. 그것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이 수도원의 신도였기 때문입니다.
황제와 교황의 주도권 다툼
814년에 샤를마뉴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제국은 붕괴되었고 유럽에는 황제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다 962년에 오토 1세 황제의 등장으로 황제가 다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는 독일과 이탈리아를 통일해 신성로마제국을 세웠습니다. 이후 황제들은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 성 미카엘 수도원의 변화를 추구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은 이미 존재하는 교회의 조직을 이용하여 행정 조직을 개혁하고 통치하고자 하였습니다. 교회의 조직은 피라미드 형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맨 위에 교황이 있고, 그 아래로 추기경, 그 아래 대주교나 주교, 그 아래 사제가 있는 구조입니다. 주교는 교회가 정한 구역에 따라 도시나 그 인근을 관리하는데, 그것을 교구라고 합니다. 일반 사제들이 관장하는 성당은 그들이 속해있는 교구의 주교의 관리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황제는 봉건제가 확립되기 이전에 교회의 조직을 활용해서 주교가 영주의 역할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황제가 자신의 뜻에 따르는 주교를 임명해야 했기 때문에 황제와 교황은 교회의 성직자 임명 문제로 격렬한 갈등을 이어갔습니다. 또한 이러한 갈등은 성 미카엘 수도원의 건축 양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는데, 황제의 자리가 있는 서쪽을 사제의 제단이 있는 동쪽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