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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을 분할하여 풍경과 신화 속의 장면을 그리고, 그림 사이에는 기둥을, 위에는 건축물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폼페이 베니의 집 벽화

     

     

    폼페이는 화산이 폭발하면서 한순간에 화산재가 그 지역을 덮고 그대로 굳어서, 화산재 아래 있던 폼페이 도시가 원래의 모습으로 보존되었습니다. 그래서 폼페이를 통해 당시 로마 시대의 모습을 알 수 있고, 폼페이의 미술을 보면서 로마 미술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폼페이에 남아 있는 로마의 흔적과 미술

    폼페이는 오랜 시간 번성하다가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순식간에 화산재 속에 사라진 도시입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을 뒤덮었던 화산재가 그대로 굳어버리면서 세월이 흘러 시체는 썩어서 없어지고 화산재 속에 시체 모양의 공간만 남았습니다. 그 속에 석고를 부으면 뒤틀린 사람의 형상을 한 석고상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그 당시 처참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한편, 화산재로 뒤덮였던 폼페이와 인근 도시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 보존되어 당시 로마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연구 자원이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저택의 벽에 그려진 많은 벽화가 화산재에 묻혀 있으면서 뚜렷하게 남아있습니다. 18세기부터 화산재 속의 폼페이 유적은 발굴되고 있지만 아직도 진행 중이며, 도시의 30퍼센트 정도가 6m의 화산재 속에 있습니다. 발굴한 유적으로 만든 폼페이 복원도를 보면, 원형 극장이 있고, 그 반대편에 로마의 포로 로마노와 같은 광장에 신전, 시장, 관청도 있습니다. 폼페이는 농업과 무역으로 인해 풍족한 도시였습니다. 부유한 도시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폼페이의 도무스는 사치스럽게 꾸며져 있습니다. 도무스의 바닥은 모자이크로 되어있고, 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헬레니즘 시대부터 비롯되던 이런 장식이 로마에서 일반적인 인테리어가 되었습니다. 

     

    폼페이의 벽화로 알아보는 로마의 그림 역사

    폼페이의 벽화는 화산재 덕분에 완전하게 밀봉이 되어 보존이 잘 되어 있습니다. 현대의 집에 벽지를 붙이는 것과 같이 고대 로마인들은 벽화를 그렸다고 할 만큼 많은 벽화가 있습니다. 폼페이에서 발견된 벽화로 로마시대의 그림의 발전을 알 수 있습니다. 폼페이 벽화를 시간 순으로 보겠습니다. 폼페이의 주택은 기원전 2세기부터 지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1기 벽화를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전 80년까지로 봅니다. 1기 벽화 초기에는 벽을 그대로 둔 채 한 가지 색으로 칠하거나 벽을 대리석처럼 보이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후 여러 가지 색을 사용하고 무늬를 넣기 시작하였습니다. 2기 벽화는 기원전 80년부터 기원전 20년까지 입니다. 이 시기부터 로마가 폼페이를 통치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림의 수준이 높아졌고, 그리스 고전기나 헬레니즘 미술을 모방했습니다. 벽에 액자나 창문을 그려 넣고 그 안에 도시 풍경을 그려서 마치 진짜 풍경처럼 보이게 하였습니다.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공간감을 주려고 했지만 원근법의 사용이 어설프게 나타납니다. 한편으로 신비의 집 벽화를 보면 디오니소스를 위한 의식으로 보이는 벽화에 여러 등장인물들이 표현되었습니다. 인물들은 사람 크기와 비슷합니다. 2기 후반에는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기원전 20년부터 서기 40년까지의 그림을 3기 벽화라고 하는데,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통치 시기입니다. 절대 군주의 등장으로 시민들의 심리는 상대적으로 위축되었을 것입니다. 2기가 입체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면 3기는 선으로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선이 가늘어지고 풍경화나 신화 그림도 사실적으로 그리기보다는 액자 같은 느낌으로 그렸습니다. 4기 벽화는 서기 40년부터 79년 화산 폭발 전까지 입니다. 폼페이에 있는 베티우스 형제의 집 '베티의 집' 벽화가 대표적입니다. 4기 벽화는 62년에 폼페이에서 발생한 대지진으로 인해 파손된 주택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양식이 등장하였습니다. 베티의 집을 보면 벽을 구획으로 나누고 풍경화나 신화 속 장면을 그린 것은 3기의 벽화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그림 사이의 공간에 기둥을 넣고 벽면의 윗부분은 건축물을 그려서 입체적으로 표현한 것은 2기의 벽화와 비슷합니다. 전체적으로는 3기에 더 가깝습니다. 54년에 왕이 된 네로 황제의 궁전 벽화는 4기 양식입니다. 선으로 벽면을 나누고 그 안에 여러 가지 동물과 식물을 그려 넣었습니다. 로마의 그림은 폼페이가 사라진 후에도 많이 변하지 않고, 기존의 형식을 결합하여 표현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폼페이의 1기~4기 벽화를 알아보는 것으로 로마의 그림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 그림을 모사한 로마의 그림

    로마의 그림은 그리스의 그림을 모사한 작품이 많습니다. 그리스의 그림이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어서 로마의 모사 작품으로 그리스의 그림을 추측할 수 있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수스 전투 모자이크는 기원전 320년경 알렉산더 대왕 재위 혹은 사후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기원전 1세기에 폼페이에서 만들어진 모자이크입니다. 폼페이의 '목신의 집'이라는 곳에서 발굴되었고, 이것은 목신의 집 안의 객실 바닥에 있었습니다. 모자이크는 다양한 색깔을 가진 돌, 유리, 타일 등의 작은 조각들을 붙여서 만드는 방법인데, 많은 정성이 들어가는 작업입니다. 모자이크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고, 로마 시대에 이르러 크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기원전 1세기쯤 폼페이에는 모자이크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이수스 전투 모자이크는 가로 5m, 세로 3m의 대형 미술품인데, 그림 속 표현은 아주 세심합니다. 방패에 비친 병사의 얼굴까지 표현되어 있는데,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표현하는 것은 그리스의 작가들이 개발한 방식입니다. 로마에서 2기 벽화가 시작되는 시기에 이 모자이크가 제작되었고, 그때부터 로마가 그리스의 그림을 본격적으로 따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의 그림을 보면 다 보여주지 않고 상상할 여지를 남겨 놓은 것이 있습니다. 등을 보이고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있어서 무엇을 보는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궁금해지고, 딸을 제물로 보내는 엄마의 얼굴을 손으로 가림으로써 그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도 그리스에서 먼저 선보였습니다. 로마는 그리스의 작품을 많이 모사하기는 하였으나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었습니다. 로마는 초상화를 그릴 때 눈에 보이는 대로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이집트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 로마의 초상화 기법으로 그려진 초상화가 미라의 얼굴 위에 놓이기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