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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미술의 중심은 다리우스 1세가 완성한 페르세폴리스입니다. 페르시아는 메소포타미아의 건축 양식을 이어받았으며 높은 단 위에 도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외에도 그리스와 이집트의 영향을 받아 융합적으로 재해석을 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이 형성되면서 페르시아 유산은 거의 파괴되었지만 페르시아의 훌륭한 문화는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페르시아 미술의 중심 페르세폴리스
페르시아의 왕이 된 다리우스 1세는 터키를 완전히 장악하고 그리스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여 제1,2차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페르시아 군대는 철수하지만 그 이후에도 페르시아는 그리스와 경쟁을 하며 150년 동안 번성합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한 다리우스 1세는 새로운 수도를 위해 건설 중이던 페르세폴리스를 완성하였습니다. 페르세폴리스는 전체 도시가 왕궁 도시였습니다. 페르시아는 메소포타미아의 건축 양식을 이어받았습니다. 지구라트와 같이 높은 단 위에 도시를 건설했는데, 단의 높이가 11m로 전체 도시가 3층 건물 높이에 건설되었습니다. 그래서 페르세폴리스로 가기 위해서는 기단 위로 먼저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양쪽에 있는 계단을 111개씩 2단을 올라가야 합니다. 기단에 올라가 페르세폴리스 내부로 들어가면 라마수가 지키고 있는 만국의 문을 지나야 합니다. 만국의 문을 지나면 오른쪽에 대 접견실이 있는데, 오늘날 남아있는 기둥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한 변의 길이가 60m, 높이가 약 21m인 7층 건물 높이의 사각 형태로 된 큰 건물입니다. 본래는 기둥이 36개 있었지만 지금은 13개만 남아있습니다. 대 접견실의 기단에는 다른 나라의 사신들의 부조가 있습니다. 페르시아가 정벌한 36개국의 의상을 입은 사신들이 진상품을 손에 들고 있습니다. 접견실의 맞은편에는 가로와 세로가 70m이고 100개의 기둥이 있는 왕궁이 있습니다. 많은 기둥이 있는 건축 양식은 그리스의 신전을 모방했습니다. 대 접견실은 페르시아 왕이 사신을 만나는 곳이었고 100개의 기둥이 있는 왕궁은 회의나 연회를 하던 곳이었습니다. 더 내부로 들어가면 다리우스 왕과 크세르크세스 1세의 각 궁전과 왕비들의 궁전이 있습니다. 다리우스 1세의 궁전을 보면 많이 파손이 된 상태로 남아 있는데, 궁전의 기단에 군인과 동물들의 부조가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융합 문화를 알 수 있는 페르세폴리스 기둥
페르시아는 넓은 영토에 다양한 민족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페르시아 사람들은 다양한 문화를 가져와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융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페르시아 미술은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좋아 보이는 것들을 가져와서 융합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그래서 페르시아 미술을 자세히 살펴보면,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 등 다양한 기원이 있습니다. 페르세폴리스 기둥에 이러한 특성이 잘 담겨 있습니다. 기둥을 보면 하단에 받침이 있고 그 위에 파피루스와 비슷한 무늬가 있고, 기둥의 상단에는 양의 뿔처럼 생긴 장식이 있습니다. 받침 위에 식물을 조각하는 것은 이집트 기둥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둥의 머리 부분 양식은 후에 그리스의 이오니아 양식의 기둥머리와 비슷한데 이 시기에 그리스의 장인이 페르세폴리스에서 일을 했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 것입니다. 또한 기둥 맨 윗부분의 동물 장식은 메소포타미아의 부조에 있었던 것입니다.
알렉산더 제국에서 발견하는 페르시아 미술
알렉산더 대왕이 거대 제국을 건설하면서 페르시아가 남긴 유산들을 거의 파괴해 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페허만 남아 있습니다. 페르세폴리스는 붕괴되었지만 페르시아의 뛰어난 문화는 알렉산더 제국에 녹아들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장악하고 난 뒤 페르시아의 금화를 모두 녹여서 자신의 얼굴을 새긴 금화를 만들었는데, 페르시아인들이 처음으로 금화를 만들어서 통치자의 얼굴을 넣는 것을 개발했습니다. 키루스 2세 시대에 금화가 처음 만들어졌고 그 후 다리우스 1세가 왕의 모습이 새겨진 금화를 표준 화폐로 제작하였습니다. 금은 어디에서나 가치를 인정받는 금속이었기 때문에 금화를 처음 제작했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집니다. 금화는 일부 지역이 아니라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될 수 있는 화폐이고 국가 간에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화폐에 왕의 얼굴을 넣는다는 것은 지배자가 누구인지 저절로 알게 하는 의미였습니다. 그 이후에도 서구 지배자들은 화폐에 자신의 얼굴을 넣어 발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