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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개로 나누어진 칸에 성경의 이야기가 각각 새겨져 있습니다.
    유니우스 바수스의 석관

     

     

    4세기경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합법화하고 이후 국교로 지정했으며, 공의회를 열어서 기독교의 교리가 정리되도록 하였습니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 기독교의 미술은 로마 인근의 카타콤의 벽화로 살펴볼 수 있고, 석관의 조각을 통해 로마 제국의 국교로 지정된 이후의 미술을 알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미술의 배경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서력기원, 즉 서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해이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 탄생을 기준으로 해가 시작되는 것에 반대하는 이슬람교 국가들이나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은 다른 연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현재 세계적으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20억 명이 넘고, 전 세계에 두루 퍼져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스라엘 지역에서 처음 발생하여 로마까지 건너가 국교로 인정받았고, 현재는 세계적인 종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시대는 313년, 기독교가 공인된 해의 전과 후로 나뉩니다. 공인되기 전에는 여러 이유로 탄압을 받았지만 공인 이후에는 국교로 지정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많은 종교를 수용한 다신교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유일신만 믿었고 다른 종교를 배척했으며 황제의 신격화에도 반대하였기 때문에 로마 제국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로마 귀족들은 기독교의 신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힘든 시기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미술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공인 이전의 기독교 미술 작품은 현재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이후에 기독교 미술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기독교 미술이란 기독교의 도상, 즉 신성한 사건이나 성상을 말합니다. 초기에는 정해진 도상이 없었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그 시도들이 결과를 만들어내었고, 이후 기독교 도상으로 정립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 미술의 그림, 카타콤 벽화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의 초기 기독교 미술을 살펴보려면, 카타콤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카타콤은 로마 인근에 만들어진 지하 공동묘지로, 지상에 묘지로 사용할 땅이 부족해서 지어진 시설입니다. 카타콤은 벽에 여러 층으로 겹겹이 공간을 만들어 시신을 보관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던 시절에 잠시 머물면서 그린 그림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헤라클레스와 알케스티스 그림을 보면, 헤라클레스가 지하 세계의 입구를 지키는 머리가 세 개 달린 케르베로스를 제압하고 있고, 타나토스도 옆에 보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케르베로스는 남편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고, 헤라클레스는 케르베로스를 되살리기 위해 지하 세계의 신 타나토스와 싸운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공동묘지에 그린 그림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린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무덤의 주인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당시 사람들이 죽은 뒤 부활하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카타콤의 또 다른 묘지 천장에 그려진 그림에는 예수가 있습니다. 천장 중앙에 원이 있고 이 원은 네 개의 반원과 이어져 있습니다. 그 사이에 손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초기 기독교인들의 기도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네 개의 반원 안에 그려진 그림이 흥미롭습니다. 반원 안에는 어떤 사람이 배에서 떨어지는 장면, 어떤 사람이 누워있는 장면, 어떤 사람이 물고기 안에서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구약성경에 있는 요나의 이야기입니다. 요나가 신을 피하여 달아나다가 물고기에게 먹힌 후 사흘 동안 기도해서 다시 살아난 내용입니다. 이것 또한 부활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중앙의 원 안에 그려진 예수는 양을 어깨에 메고 있는데, 이 시기에는 예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그리스 로마 시대에 표현하던 그림을 참고해서 표현했습니다. 양을 어깨에 메고 있는 모습은 고대에 많이 그려지던 표상이었습니다. 고대 신을 표현하던 모습들이 기독교에 반영된 것은 많이 있습니다. 가령 이시스 여신이 아들인 호루스 신에게 젖을 주는 조각상은 나중에 기독교에서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조각상을 제작할 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초기 기독교 미술의 조각, 석관에 새긴 조각

    기독교가 더 이상 탄압받지 않고 더 나아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것은 이변이었습니다. 국교로 선언된다는 것은 국교 외의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집트 신전과 그리스 로마의 신전도 부정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를 주도한 사람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경쟁자인 막센티우스와 전쟁을 할 때의 일입니다. 중요한 전투 전날 밤, 그는 꿈에서 신의 계시를 받고 다음 날 전투에서 이기게 됩니다. 그 후 그는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마도 정치적인 이유로 이 같은 결정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는 아주 혼란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를 인정함으로써 자신도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라는 것을 알리고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에서 공의회를 열어 기독교의 교리를 하나로 만들어서 정리했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기독교식 석관이 만들어졌습니다. 니케아 공의회가 열리던 시기에 만들어진 석관을 보면, 신이 세 명 있습니다. 한 명은 의자에 앉아 있고, 두 명은 그 뒤에 서 있습니다. 이렇게 신을 세 명으로 나타냈다는 것은 당시 니케아 공의회에서 논의되던 삼위일체의 신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전의 석관에서는 부활을 표현한 것이 전부였다면 이제는 삼위일체의 기독교 교리 해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석관을 교리적 석관이라고 하는데,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빵 5개로 5,000명이 배부르도록 하고, 죽은 나시로를 살아나게 하는 등 예수가 보여준 기적의 내용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들이 복잡하게 섞여 있어서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시간이 지나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서 자리 잡으면서 조금씩 석관의 내용이 정리됩니다. 359년경 제작된 유니우스 바수스의 석관에는 총 10개의 성경 속 이야기가 조각되어 있는데, 하나의 칸에 하나씩 이야기가 잘 구성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