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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서유럽은 비잔티움 제국의 앞선 동방 문화를 접할 수 있었고, 십자군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피사, 베네치아 등의 도시들이 발전하면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피사의 피사 대성당과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과 같은 웅장한 건축물이 세워졌습니다.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서유럽의 변화
중세 기독교인들은 성지 예루살렘에 가기를 열망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거리가 멀기도 했고 이슬람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가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하기를 원하면 이슬람 술탄의 허락을 받아 조심스럽게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하기를 원했고, 그들은 이교도를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되찾고 싶어 했습니다. 결국 1095년에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대규모 원정대를 결성했습니다. 원정대가 구성된 결정적인 이유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가 도움을 청했기 때문입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의 셀주크 튀르크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난 뒤 이슬람이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에 로마 교황은 비잔티움 제국을 도우면 동로마 교회보다 더 높은 위치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십자군 원정을 결정했습니다. 성지에서 이교도를 쫓아내고자 하는 종교적인 명분은 중세 유럽 기독교인들의 지지를 받았고, 교황의 간곡한 설교에 유럽의 수많은 사람들이 참가한 대규모 십자군 원정대가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은 예루살렘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고, 기독교 원정대와 이슬람군은 거의 200년 동안 격렬히 전쟁을 치렀습니다. 이 전쟁을 두고 기독교인들은 십자군 전쟁이라 하고, 이슬람교도들은 지하드라고 합니다. 이 전쟁은 처음에 기독교가 승리하여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4개의 기독교 왕국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곧 이슬람의 반격이 이어지면서 전쟁은 또다시 200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전쟁은 결국 이슬람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콘스탄티노플에 가게 되면서 비잔티움 제국의 모습을 직접 보았고, 하기아 소피아와 같은 건축물의 화려함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슬람 제국에서는 수학, 천문학, 지리학, 의학과 같은 과학 지식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11세기에서 13세기에 일어난 십자군 전쟁은 결과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앞선 문명이 서유럽에 소개되고 도입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십자군 원정이 실패하면서 십자군 원정을 주도했던 교황의 권위는 떨어졌고, 교황의 권위가 약해지면서 유럽 사회에 대한 종교의 힘도 약해졌습니다. 그리고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지중해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유럽 도시들이 성장했습니다. 대표적으로 피사와 베네치아가 있습니다. 경제와 문화가 발전하면서 상인이 성장하고 기술을 가진 화가, 건축가들도 자리 잡으면서 고딕 미술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피사의 사탑, 대성당 그리고 세례당
피사의 사탑과 피사 대성당, 세례당의 규모를 보면 11세기에 피사가 번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대성당을 건립할 때 종탑과 세례당이 따로 지어졌기 때문에 피사 대성당도 종탑과 본당, 세례당이 각각의 건물로 지어졌습니다. 피사의 사탑은 건립 직후부터 땅의 표면이 조금씩 가라앉아서 15도 정도 기울어져 있습니다. 피사 대성당 본당은 12세기 초에 완성되었고, 13세기 초에 확장 공사를 해서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규모를 살펴보면 100m 길이에 35m의 전폭과 34m 높이의 전고를 가진 거대한 모습입니다. 성당 내부는 매우 큰 모자이크화와 대리석 벽, 천장의 금박 장식으로 화려합니다. 피사 대성당의 외관을 보면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져서 깔끔하고 형태도 단정합니다. 그리스 로마의 영향을 받은 듯한 로마네스크 양식입니다. 이는 프랑스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역마다 로마네스크 양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피사 대성당과 같은 형태의 건축물을 토스카나 로마네스크 양식이라고 부릅니다. 피사 대성당의 정면을 보면 4단의 아케이드가 보입니다. 아케이드는 아치와 기둥들이 나란히 있는 공간을 말합니다. 실제 이탈리아 북부, 독일 남부에서 건물 외벽에 아케이드가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피사 대성당의 정면은 아케이드로 인해 화려한 모습을 자랑합니다. 후에 피사 종탑을 만들 때는 6단의 아케이드를 만들었습니다. 피사 대성당을 자세히 보면 아치 부분에 장식이 많이 들어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피사 세례당은 아래쪽은 로마네스크 양식이고 위쪽은 고딕 양식으로 되어 있는데, 건축 기간이 연장되면서 나타난 형태입니다. 그리고 피사 세례당은 예루살렘의 예수 성묘 교회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베네치아 미술, 산 마르코 대성당
전쟁이 이어지면서 십자군은 점차 초심을 잃고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같은 기독교도들을 가혹하게 처단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약탈했습니다. 4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진격하기 전에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느끼고 베네치아 사람들과 거래를 했습니다. 십자군은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도시 자라를 찾아주는 대가로 지원을 받기로 했습니다. 베네치아 사람들이 원했던 자라는 지중해의 교역에 중요한 지점이었습니다. 거래는 성공적으로 끝이 났고, 베네치아 상인들의 지원을 받은 십자군은 같은 기독교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것입니다. 이때 베네치아 상인들은 콘스탄티노플의 많은 영토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1261년, 비잔티움 제국은 십자군을 몰아냈지만 재건에 실패했고 1453년에 이슬람에 의해 몰락했습니다. 반면 베네치아는 이후로 무역을 통해 번성했습니다. 베네치아 초기의 건축물로 산 마르코 대성당이 있는데, 여러 번 불태워져서 여러 번 재건축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1063년 재건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는 피사의 대성당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고, 피사와 베네치아는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를 의식하며 건축물을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산 마르코 대성당의 천장은 반구 모양의 돔으로 되어있고 내부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산 마르코 대성당의 내부는 모자이크 장식과 기하학적 구성으로 아름답습니다. 이 성당은 비잔티움 제국의 건축 양식과 비슷합니다. 내부는 하기아 소피아와 돔 부분이 많이 유사합니다. 산 마르코 대성당은 베네치아가 문화적으로 우월한 비잔티움 제국과 가깝게 지내면서 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베네치아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약탈한 보물로 산 마르코 대성당을 장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