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고대 로마 제국이 몰락하고 난 뒤에 혼란스러웠던 서유럽은 샤를마뉴가 나타나서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점차 안정을 되찾았고, 독실한 기독교인인 샤를마뉴 왕으로 인해 기독교를 중심으로 교황과 연맹하여 강력한 왕국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 거의 400년 동안 교회 건축물이 지어지지 못했는데, 팔라틴 예배당을 시작으로 건축의 모색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샤를마뉴 왕과 카롤링거 르네상스
8세기 후반부터 9세기까지를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중세의 형태가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보기 힘들었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유산들의 복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무질서가 정리되는 시기, 중세의 암흑기가 종료되는 시기입니다. 카롤링거 왕조의 대표적인 왕이 샤를마뉴인데, 그는 바이킹족이 등장하기 전인 9세기 초에 서유럽을 다스렸던 프랑크 왕국의 왕입니다. 카롤링거 왕조는 중세 초기에 서유럽에서 가장 강한 왕조였습니다. 프랑크 왕국은 5세기부터 9세기까지 현재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번성하였습니다. 프랑크 왕국은 게르만 부족 국가에서 시작하였고, 샤를마뉴 시기에 서유럽의 대부분 영토를 점령하였습니다. 그 후 내부 다툼과 바이킹족의 칩입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샤를마뉴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회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에 심취하였으며 자신의 영토 확장이 종교전쟁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샤를마뉴의 적은 기독교 이단과 이슬람 세력이었고, 이러한 적으로부터 기독교 왕국을 지키고 확대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여 학문과 교육, 예술 등에도 관심을 가지고 문화 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문화 사업의 방향은 그리스 로마 문화를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샤를마뉴는 글을 읽지는 못했지만 리더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혼란에 빠진 시대를 정리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적 가치를 통해 왕국을 통일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제국 건설
서구에서 기독교는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 짓는 기준이 됩니다.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있는 튀르기예(터키)가 유럽 국가가 아닌 이유는 튀르기예(터키)가 기독교 국가가 아닌 이슬람교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날의 유렵 경계가 9세기 샤를마뉴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프랑크 왕국을 세운 클로비스 1세는 496년에 기독교로 종교를 바꾸고 세례도 받았지만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없었습니다. 샤를마뉴가 처음으로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게르만족의 제국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왕권과 신권을 결속하려던 시도를 완수하였습니다. 샤를마뉴의 철저한 기독교적 태도가 교황의 세력과 연맹을 이루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샤를마뉴가 왕위에 있을 때 로마의 교황과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서로 대립하며 힘을 겨루고 있는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교황은 세력이 강하고 성실한 기독교인인 샤를마뉴와 손을 잡고자 하였습니다. 마침내 800년 12월 25일에 교황은 샤를마뉴를 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였습니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당시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던 라파엘로가 이 일을 벽화로 그린 것이 바티칸 궁전에 있습니다. 이 시기부터 서구에서는 교회가 왕의 권위를 보장하는 형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서구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군주의 표상이 완성되었습니다. 16세기에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샤를마뉴 그림을 보면, 한 손에는 검을 들고 있고 다른 한 손에는 십자가가 달린 공 같은 것을 들고 있습니다. 강한 무기와 기독교 신앙을 겸비한 군주의 모습입니다. 샤를마뉴가 죽고 프랑크 왕국이 분열하여 후대에 동프랑크는 독일로, 서프랑크는 프랑스가 됩니다.
산 비탈레 성당을 모방한 팔라틴 예배당
팔라틴 예배당은 초기 기독교 시기와 중세를 연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샤를마뉴가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을 모방하여 만들어서 둘의 구조가 비슷합니다. 서유럽 쪽에서는 팔라틴 예배당을 지을 때 참고할 정도의 건물이 없었습니다. 거의 400년에서 800년까지 서유럽에서는 큰 공사를 할 만큼 강한 정치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건물이 세워지지 못했습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건축의 측면에서 시대적으로 쇠퇴하는데 팔라틴 예배당을 시작으로 교회가 지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팔라틴 예배당은 200년 동안 가장 큰 예배당의 명성을 유지하였습니다. 팔라틴 예배당은 그리스 로마의 유산이 서유럽에서 이어지도록 한 장본인입니다. 팔라틴 예배당에는 금빛의 샤를마뉴 흉상의 성 유물함이 있습니다. 샤를마뉴는 사후 그가 정성을 기울여 만든 팔라틴 예배당에 묻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