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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할 것 같던 로마 제국이 3세기경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이 시기의 조각상은 공동체의 가치가 아닌 개인의 감성을 담은 장식품으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로마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사상이 없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무덤 양식 없이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로마가 점점 몰락해가는 시기에 기독교가 로마에 전해지고, 로마의 국교로 정해지면서 유럽 전체로 전파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몰락의 조짐과 조각상의 변화
로마는 부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나라를 정벌하여 그 땅을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배분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서기 100년에 트라야누스 황제가 아프리카 북부에 팀가드라는 도시를 건설해서 퇴직한 군인들에게 지급하였습니다. 하지만 귀족들은 여전히 시민들의 땅을 수탈하여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는 계속해서 전쟁을 일으켜서 영토를 확장해야만 성장할 수 있는 구조가 되었습니다. 귀족들도 역시 전쟁으로 확보된 노예로 농장을 유지했습니다. 로마가 전쟁을 통한 정벌을 멈추게 되자 노예도 더 이상 수급이 안 되었고, 노예의 가격이 급등하였습니다. 그래서 귀족은 비싼 노예 대신 농민에게 소작을 주는 것으로 변경하였습니다. 그러자 소작농이 늘어나면서 군인의 수가 감소하여 군사력이 점점 약해졌습니다. 게다가 귀족들의 탈세로 제정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2세기 말에 귀족들은 나라의 안위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나라에 대한 헌신은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카라킬라 황제가 지은 카라킬라 목욕장은 1,6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시설입니다. 내부로 들어가면 바깥쪽으로 도서관, 체육관과 같은 시설이 있고, 중앙에 목욕탕을 설치하였습니다. 이러한 공간 배치는 탁월하여 현대의 많은 건축가들도 감탄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로마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는 황제나 귀족이 시민을 존중하는 입장에서 시민들에게 선물로 공공시설을 지어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왕정의 말기로 접어들면서는 황제나 귀족들이 시민을 관리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시민들의 건전한 요구를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 공화정 시대의 조각은 공동체의 가치나 시민이 가져야 할 덕목을 표현했다면, 로마 왕정시대의 조각은 부자들의 집이나 휴양처의 장식품으로 치부됩니다. 조각상은 그저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존재로 여기거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콤모두스는 로마 제국이 쇠퇴를 이끈 황제인데, 콤모두스 조각상은 황제 개인의 기호에 따른 사적인 조각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또 안티노우스-오시리스 조각상은 진정한 개인적인 감성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사이가 각별했던 시종 안티노우스가 물에 빠져서 죽고 난 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안타까운 마음에 조각상을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오시리스는 고대 이집트의 저승을 관장하는 불멸의 신인데,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안티노우스 조각상을 오시리스의 모습으로 제작하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무덤
로마 제국에서는 죽음에 관한 사상이나 종교가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공화제 시대의 로마 사람들은 사후 세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현재의 삶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화장했습니다. 그런데 왕정 시대가 되면서 시신을 땅에 묻게 되는데 무덤을 만드는 방식이 없어서 개인이 자신의 방식대로 진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외국의 장례 문화를 모방하여 피라미드 형태의 무덤을 만들기도 하고, 제빵사인 사람의 무덤을 화덕 모양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황제의 무덤조차 정해진 양식이 없었습니다. 루도비시의 대석관을 보면, 군인의 석관인데 석관의 표면에 그가 전쟁에서 적을 물리치는 근사한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내세관이 없던 그 군인은 죽음을 앞두고 죽음 이후의 시간에 대해서 허무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파고들어 로마를 종교적으로 장악한 종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이스라엘에서 시작하여 로마에 들어온 후에 환영받지 못하다가 결국 로마제국의 국교로 정해졌습니다.
로마 제국의 몰락과 기독교의 전파
로마 제국은 다양한 문화를 존중하며 정복한 나라의 종교도 탄압하지 않고 로마의 종교 안으로 포용하였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12 신을 모셨지만 다른 신들이 새로 만들어져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로마는 처음에 기독교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후 예수의 제자들이 적극적으로 선교를 하여 그리스와 이탈리아까지 전도를 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로마의 다신교를 부인하고 우상 숭배 반대를 이유로 황제의 신격화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기독교는 로마에서 탄압받았습니다. 큰 화재가 발생하거나 전쟁에서 지거나 전염병이 도는 등 로마에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독교인을 압박받았지만, 기독교의 세력은 점점 더 확산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빈부 격차가 심한 로마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고, 사후 세계에 대한 대비가 없는 로마인들에게 조금씩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선포함으로써 기독교인을 더 이상 탄압하지 않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전쟁에서 이기고 로마로 돌아와서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전통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개선문만 설치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은 6층 높이 정도의 거대한 규모에 3개의 아치로 되어 있습니다. 개선문에는 많은 조각들이 있는데, 이 조각들은 다른 곳에서 가져온 조각들을 붙인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재임 기간에 만들어진 조각도 있고, 다른 황제 시대에 새겨진 조각들을 가져온 것도 있어서 여러 형태의 조각들이 함께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개선문에 기독교를 나타내는 조각은 넣지 않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결정 이후 392년에 로마의 국교로 정해집니다. 그리고 로마는 395년부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서로마와 동로마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476년에 서로마는 몰락하고 동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동로마도 1453년에 멸망했습니다. 로마는 서구 문명의 중심니다. 로마 제국은 민주주의의 시초인 그리스의 문화를 그대로 계승하였고, 또한 기독교가 유럽 전체에 퍼져나갈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