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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구스투스가 갑옷을 입고 오른 팔을 들고 있고, 오른쪽 다리에 큐피트가 있는 조각상입니다.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 조각상

     

     

    로마에서는 사람들의 신뢰를 잃은 원로원을 대신하여 왕정 시대가 등장하였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황제는 사람들에게 황제의 권위를 알리기 위해 많은 조각상을 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제작된 조각상은 넓은 지역 곳곳에 세워져 사람들에게 황제를 널리 알리려는 목적을 달성하였지만, 조각상 자체의 아름다움은 퇴색하였습니다.

     

    로마의 왕정 시대에 제작된 조각상의 특징

    로마는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지중해의 최대 강자가 되었습니다. 식민지가 계속 늘어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는데, 원로원 귀족들이 그 부를 독식하였습니다. 귀족들은 포에니 전쟁의 승리로 획득한 식민지에 라티푼디움이라는 거대한 농장을 만들고 포로들을 이용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들은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갔고, 그 사이에 땅은 황폐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살기 위해 로마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원로원에 실망한 사람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들에게 지지를 보냈습니다. 이 장군들이 로마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카이사르가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공화정을 지키고자 했던 브루투스에 의해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면서 혼란스러운 시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원로원이 이미 사람들의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공화정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고, 새로운 정치 제도가 등장하였습니다.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황제가 됩니다. 로마의 황제는 세습되지 않았고, 원로원과 시민들의 옹립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황제는 권리뿐 아니라 시민을 위한 막대한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로마 시민들에게 봉사와 책임을 다 하고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고, 여기에 미술이 이용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로마 왕정시대에는 황제의 권위를 알리기 위해 조각상이 제작되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조각상

    로마 시대에는 가문의 정통성을 나타내기 위해 특정 인물에 대한 초상 조각이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왕정 시대에 들어서서는 황제의 권위를 신격화하는 용도로 조각품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첫 번째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조각상은 지금 150개가 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 조각상을 보면, 얼굴은 특징이 잘 나타나 있기는 하지만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고, 잘 다듬에서 성스러운 느낌이 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갑옷을 입고 있어서 든든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다른 아우구스투스의 조각상이 있는데, 황제의 머리에 토가를 감싸고 종교적인 의식을 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선명한 옷 주름과 단정한 자세 등이 황제의 거룩한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에서는 신의 조각만 맨발로 제작하였는데, 맨발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조각상도 있습니다. 이렇게 황제를 신격화했으며, 황제가 죽으면 신전에 받들었습니다. 75세에 생을 마감한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모든 조각상에서 20대 젊은이의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그것은 젊은 남자의 몸을 신성하게 생각한 그리스 문화를 이어받은 부분입니다. 그리고 황제의 조각상은 오른팔을 앞으로 들고 있는 모습을 제외하면 그리스의 도리포로스와 비슷한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황제의 몸을 그리스 조각상의 완전한 몸매에 갑옷을 두른 모습으로 그려냈습니다. 한쪽 팔을 앞으로 들고 있는 것은 대표적인 지도자의 상징입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조각상은 로마와 제국의 여러 곳에 설치하여 제국의 백성들에게 왕이 누구인지 알렸습니다. 이는 황제의 권위나 근엄함을 잘 드러내면서 개인적인 특성까지 효율적으로 잘 담아낸 효과적인 홍보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각상은 그 자체로의 아름다움이 퇴색되고 황제의 권위를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아라 파치스의 조각

    아우구스투스가 세력을 강화하면서 로마의 혼란이 정리되었습니다. 기원전 9년에 아우구스투스가 이룩한 안정을 기념하기 위해 아라 파치스라고 하는 평화의 재단을 만들었고, 내전이 끝난 뒤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가 아라 파치스에서 제를 올렸습니다. 로마제국이 몰락하면서 아라 파치스도 파괴되었고, 1938년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가 부서진 조각들을 모아서 복원하였습니다. 아라 파치스에는 아주 많은 조각으로 수놓아져 있습니다. 제단의 동쪽 면에는 두 아이를 안고 있는 대지의 여신이 있으며, 그 주위에는 다양한 동물과 여신들의 조각이 있습니다. 이 조각은 그리스의 헤게소의 묘비에 새겨진 조각과 비슷합니다. 그리스 고전기 양식이 아직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지의 여신이 입고 있는 옷의 주름이 헤게소의 묘비에서 보다 뻣뻣하고 둔탁해 보입니다. 제단의 남쪽 면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일가가 새겨져 있습니다. 특별하지 않은 구도로 인물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이것은 감상이나 정서적인 감동을 위한 것이 아니라 로마를 안정시킨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뛰어난 업적을 후손에게 남기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조각에는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아내, 그의 사위 등 아우구스투스 일가가 있습니다. 개인과 그 가족에 대한 경배가 나타남으로써 아라 파치스는 로마가 공화정에서 왕정으로 나라의 성격이 바뀌었음을 보여줍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망 후 잠깐 혼란기가 있었지만, 그 후에 5명의 훌륭한 황제가 로마를 통치하면서 로마는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로마는 황제의 능력도 뛰어났지만, 로마가 가진 시스템이 잘 작동하여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시스템은 수도, 하수도, 도로였으며, 이 기간 시설을 기반으로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