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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이 쇠퇴할 무렵,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새로운 시대가 펼쳐졌습니다. 야만족이라 불리던 게르만족이 서로마를 차지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유럽의 학문과 예술에는 암흑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만 속세와 동떨어진 곳에 위치한 수도원에서 고대 문명의 명맥이 이어집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로마인들이 야만족이라고 무시했던 게르만족은 5세기경 서유럽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게르만족은 유럽 북쪽에서 게르만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을 통칭해서 가리키는 말입니다. 현재 북유럽과 독일, 영국에 게르만족의 후예들이 다수 있습니다. 게르만족은 전투에 강한 민족이라서 로마의 번영기인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있었던 로마군과의 전투에서도 승리하였습니다. 그런데 게르만족은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 전해지는 게르만족에 대한 기록은 로마인에 의해 쓰인 것만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게르만족을 야만인으로 표현했습니다. 375년부터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고 568년까지 계속 이어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5세기 초가 되었을 때 로마는 쇠약해져서 게르만족이 로마의 국경을 쉽게 넘나들 수 있었습니다. 게르만족이 로마를 침략했다기보다는 그들은 대부분 굶주림이나 훈족들에게 밀려 남쪽으로 오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은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로마군이 되는 시민들이 감소하면서 게르만족이 없으면 로마군이 지속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결국 로마 제국을 점령한 게르만족의 왕들은 로마 제국의 문화를 높이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476년에 서로마 황제를 타도하고 왕이 된 오도아케르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에게 충성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의 문화를 계승하고자 하였으나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유럽에는 학문과 예술의 암흑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나마 수도원에서 고대 문명을 간신히 이어 나갔습니다.
수도원 문화의 탄생
수도원은 원래 수도사가 모여서 수행하는 곳입니다. 초기의 기독교 수도사 중에서 대표적인 성인은 안토니우스입니다. 그는 세속을 멀리하고 청빈한 삶을 추구하면서 토굴에서 수행하였지만, 그를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시메온 성인은 37년 동안 16m 높이의 기둥 위에서 수행하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죽기 전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유명세를 얻어서 아무것도 없던 사막 한가운데 마을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시리아에 있었던 시메온 성인의 이야기가 독일에까지 전해져서 시메온 성인을 모방해 기둥 위에서 수행한 수도사가 있기도 했습니다. 평범한 기독교인들은 이런 극한의 절제된 환경 속에서 수행하는 수도사들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은 신자들의 믿음을 고취시키고, 신앙의 전파를 견인합니다. 시간이 흐르자 단체로 수도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성인을 가까이에서 본받고 싶어 하는 수도사들이 많아지면서 성인이 죽은 곳에 모여 수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수도사들이 지낼 곳이 필요했기 때문에 수도원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기독교를 전파하거나 이교도와의 대립에서 기독교인들을 지키는 역할까지 하는 다양한 수도원들이 지어졌습니다.
성 카타리나 수도원과 중세의 수도원
성 카타리나 수도원은 4세기에 지어져서 6세기에 보강 공사를 하고 현재까지도 사용하는 곳입니다.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 있는 미술품은 대부분 오늘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집트 지역에 속해 있었고, 7세기부터 이슬람의 지배 아래 있었는데, 이슬람은 이 수도원을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였습니다. 내부로 들어가면 예수와 세 명의 제자, 그리고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있는 모자이크화가 있습니다. 모자이크화 속의 예수의 모습이 현재 우리에게 친숙한 예수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의 얼굴을 정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정해지면서 예수의 얼굴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검소한 이미지를 선호하였습니다. 성 카타리나 수도원의 나무판에 그려진 예수의 모습은 검소한 모습이 더욱 강조되어 있습니다. 중세의 수도원은 거의 작은 마을과 비슷합니다. 수도원의 담 안으로는 성당과 수도사의 묘지, 밭, 축사, 제빵소 등 수도사들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많은 건물들이 있었습니다. 중세의 수도원은 세상과 동떨어진 곳에서 필요한 물자를 직접 생산할 수 있는 신앙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중세 수도원은 외부와의 접촉을 극소화하며 엄격하고 자세하게 규칙을 정해서 실천하였습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노동과 기도로 하루 일과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수도사들은 세속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신앙생활을 원했기 때문에, 수도원은 몬테카시노 수도원처럼 산꼭대기나 메테오라의 성 삼위일체 수도원처럼 바위 절벽 위에 지어졌습니다.